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고 차베스 (문단 편집) === 대통령 취임 === 여하튼 간에 방송 연설로 유명인이 된 차베스는 옥중에서도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기권운동을 주장하여 라파엘 칼데라의 득표율보다 높은 기권율 40%를 기록하는데 공헌했고, 94년 라파엘 칼데라의 사면으로 출소한 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권에 투신한 뒤에도 한동안 선거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으나 1997년 들어 생각이 바뀌어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틀고 군소정치조직에 불과했던 "볼리바르 혁명 200"을 확대재편하여[* 원래는 이 이름 그대로 정당을 창당하려고 했지만 1997년 5월 베네수엘라 법원에선 볼리바르를 당명으로 사용할수 없게 하도록 판결을 내려 당명으로 쓸 수 없게 했다.] "제5공화국 운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했고 사회주의 운동당, 애국당 등과 좌파연합(애국전선)을 결성, "제3의 길"을 정책노선으로 내걸고[* 당시 [[영국]] [[노동당(영국)|노동당]]이 정책노선으로 내건 "제3의 길"과는 다르다. '''[[공산주의]]의 [[자본주의]] 사이의 중도를 추구한다는 뜻'''에서 제3의 길이라고 이름 붙인 것. 명칭만 차용하였다.] 모라토리엄 선언과 사회주의적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때 뚜렷한 비전과 투박하면서도 열정적인 연설 등으로 탄탄하게 지지기반을 다져나가며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결국 1998년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아버지[* 참고로 차베스의 아버지인 우고 데 로스 레예스 차베스는 교사출신으로 기성정당에 가입하기도 했는데 1970년대에 당시엔 민주행동당 당원이었고 이후 1978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사회기독당 당원으로 가입할 정도로 의외로 정치성향이 보수적(?)이긴 했지만 아들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아들의 정당인 제5공화국 운동에 참여했고 1998년 지방선거에서 바리나스 주지사 선거에 당선되었다. 참고로 2008년에 주지사 직에서 은퇴했고 현재 그 자리를 우고 차베스의 형인 아단 차베스가 잇고 있다.]를 바리나스 주지사로 당선시켰고 그 이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약진했으며(의회 다수는 차지하지는 못했다.)[* 당시 총선에서 원내 1당은 민주행동당이 차지했고(상원 19석, 하원 62석) 제5공화국 운동은 상원 12석, 하원 46석으로 2당이었다. 연합정당인 사회주의를 위한 운동(2001년에 연정에서 이탈)이나, LCR(2000년 대선에서 야당후보를 지원하면서 연정에서 이탈), 모두를 위한 조국을 합해도 절반을 넘기지 못한다(하원 76/207, 상원 19/54).] 이어서 치러진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디어 56,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상반기만 해도 차베스가 주요대선 주자로 언급되기는 했으나 유력 대권주자급은 아니었고 오히려 1981년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이자 카라카스 산하 차카오 시장(한국으로 치면 구청장) 이레네 사에즈(당시 사회기독당 소속)가 차카오 시장 재직당시의 범죄율 하락같은 성과를 내세워 지지율 1위 자리를 차지했지만 정작 사회기독당 소속 대선후보로 지명된 이후에 외교정책이나 경제정책에 대한 대안부재에 대한 우려감으로 지지율이 떨어져 차베스가 "21세기 사회주의" 같은 뚜렷한 비전을 내세우고 살라스 호메르(원래 사회기독당 소속이었으나 탈당 뒤에 베네수엘라 프로젝트라는 가설정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도 경제학자 출신인 점을 내세워 지지율이 급속히 올라가면서 순위에서 밀리자 결국 선거를 며칠 앞두고 출마를 포기했다. 다만 이미 투표용지에 이레네 시에즈의 이름이 적혀있는 채로 인쇄되었기 때문에 일단 선거에 참여한걸로 되어있다. 참고로 최종득표율은 2.8%. 이때 사회기독당과 민주행동당은 차베스의 당선을 막기 위해 각자 출마를 포기하고 경제학자 출신인 엔리케 살라스 호메르(무소속) 후보로 단일화했지만 결국 기존 우파-중도파정당연합(엔리케 살라스 호메르) 소속 후보는 40%의 득표율로 대참패(...). 이후 이레네 사에즈는 1999년 누에바 스파르타 주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2000년 대선-총선-지선 동시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면서 정계에서 떠났다. 대통령 당선 직후에 미국이 급진적인 공약과 과격한 발언을 이유로 경고성 축하 서한을 보내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참고로 차베스는 1996년에 미국에 입국하려고 비자발급을 신청했지만 1992년 쿠데타 시도를 이유로 미국 방문 비자 발급이 거절되었다. 즉, 정책 차이 외의 이유로도 미국과의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던 것.] || [youtube(aRpcNRWpdRU)] || || 개표 완료 후 차베스 소개영상(베네비시온) || 하지만 대통령 당선 이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원래 베네수엘라에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같은날에 치르는게 관례였으나 차베스의 약진에 위기를 느낀 의회가 국회의원 선거가 대통령 선거보다 한 달 일찍 치르도록 변경했고 그 결과 베네수엘라 의회는 야당이 다수가 되어 여소야대라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 차베스는 이미 선거운동 시절부터 기존의회를 해산하고 새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으며[* 제5공화국 정당이라는 운동은 이를 가리킨다.] 제헌의회 전술을 이용해 개헌을 시도했다. 구체적으로는 양원제로 구성되어있던 베네수엘라 의회를 단원제로 개편하고,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시키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이 부분은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2007년에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던 문제의 개헌안도 프랑스 헌법의 영향을 받았다(정작 프랑스에선 2000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시켰지만).] 연임을 허용[* 그 이전 4공화국 시절에도 대통령의 재선은 허용되어 있었지만 연임은 불가능했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권이 장악하고 있던 기존 의회를 대체한 새 제헌의회 선거에서 여당연정이 압승을 거두었고 개헌에 성공한 뒤 기존 의회를 사실상 무력화한 뒤에 치러진 [[2000년]] 대선에서 59.8%라는 득표율로 역시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차베스에 맞선 사람이 1992년 쿠데타 미수사건의 동기인 프란치스코 아리아스였다. 쿠데타에 실패한 뒤 차베스와 같이 깜방에 갇히기도 했지만 출소후에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거에 회의적이었던(나중에 생각이 바뀌었지만) 차베스랑 다른 길을 걸어 야당 대선후보가 되었던 것. 나중에 차베스와 화해해서 베네수엘라 통합사회당에 입당했다.](5공화국 헌법상 1선)에 성공했고 동시에 치러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과반확보에 성공했다. 이미지와는 다르게 1선에서의 지지기반은 빈민이 아니라 중산층이었다.[* 그 이후에 여러가지 사건들이 겹쳐 중산층들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는데, 특히 차베스가 원유가격의 상승을 위해 여러 반미 지도자들과 회동을 가지기도 했고, 차베스가 여러모로 급진적인 정책을 펼칠까 불안감을 느껴 반 차베스파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차베스는 너무 성급하게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이미 '''의회에서 여당연정이 과반을 확보하고 있었는데도 공론과정을 생략하는 바람에(특히 49개의 개혁법안을 의회의 동의없이 통과시킨게 결정적인 발단이 되었다.)''' 연정 내부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했고 결국엔 이들 이탈자를 맞아들인 차베스 반대파가 세를 불리게 되면서 연립여당까지 합해 100석을 넘던 여당은 80석대 중반으로 주저앉고 야당진영은 70석대 후반까지 불어났다. 결국 이 시기부터 세가 불어난 반대파의 저항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결국 [[2001년]] 하반기부터 반대파의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되었고 특히 2002년 군내 우파에 의해 [[쿠데타]]로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쿠데타는 대다수의 언론과 대기업의 지지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여론지형상에서 반 차베스파가 차베스에게 우위를 보일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쿠데타의 주도세력이 극우세력이라 차베스 반대파 내부의 중도파와 좌파를 배제했다. 특히 차베스가 내건 49개의 개혁법을 모두 무효화하는건 물론[* 연정을 이탈했던 좌파/중도좌파 (옛) 여당들도 이 개혁법은 지지하고 있었다.] 콜롬비아 내전에 개입하고[* 차베스는 콜롬비아가 내전으로 골머리를 앓을 때 본체만체했다.] 무엇보다도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밝히면서 주요 야당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야권에서도 쿠데타 지지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져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더군다나 차베스가 대통령 사퇴서를 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차베스 딸의 통화내용을 통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나면서[* 이때 차베스가 결사항전을 하려다가 쿠데타군이 수도를 장악했다고 판단하자 사임협상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쿠데타군이 무조건적인 사임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되었고 결국 차베스는 사임의사를 철회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 언론사에서 이런걸 전부 쌩깐채 쿠데타 군인측의 의견를 받아적다보니 이런 오보가 나왔던 것. 이때 카스트로의 역할이 주요했는데 차베스의 딸이 [[피델 카스트로]]에게 전화를 걸어 차베스가 사임의사가 없음을 밝혔고 카스트로는 외신 기자를 불러서 차베스가 사임의사가 없음을 밝히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군내 차베스 지지파가 반발하고 빈민층 30만명이 차베스를 적극 지지하면서 쿠데타 규탄 시위를 벌였다. 물론 처음에 빈민층의 시위를 진압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났지만 결국 장기간의 내전이 펼쳐질까 우려한 쿠데타 주도세력이 권력을 포기하기로 하면서 결국 이 쿠데타는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차베스는 국정에 복귀했다. 언론에서는 RCTV가 가장 강렬하게 차베스를 반대했다. RCTV는 쿠데타를 적극 옹호했던 방송국이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엔 일방적으로 편파보도를 일삼다가 쿠데타가 차베스 지지시민의 대대적인 반발로 좌절되고 차베스가 복귀하자 그 날 하루동안 뉴스 프로그램을 안보내고 오락프로그램으로 채웠다(...). 그 이후에 2004년 국민투표까지 차베스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지면서 결국 2007년 재허가 심사에서 떨어졌고 현재는 일개 케이블 TV 방송국으로 전락했다. 물론 지상파 방송권 박탈에 대한 반발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야당이 2005년 총선을 보이콧한지라(...)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힘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연이어 쓴 맛을 본 야권에선 2010년 총선에 적극 참여해서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언론에게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차베스는 쿠데타 진압 이후에 공동체 방송국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그 덕분에 현재 베네수엘라는 공동체 미디어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대파의 저항은 거셌고 특히 차베스가 급진적인 정책을 펼칠까 우려한[* 1999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국가의 보이는 손이 서로 맞잡는 중간지대를 경제정책의 목표로 제시했고 그에 따라 거시경제정책면에서 이전 정부의 장관을 유임했을 정도로 경제정책면에서 그리 급진적이지는 않았다.] '''중산층들도 반 차베스파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 때 벌어진게 [[2002년]]과 [[2003년]] 상반기에 걸쳐서 벌어진 자본 파업과 연이어서 벌어진 석유 파업으로 대기업과 노조(특히 석유노조)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총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주요 공장들과 쇼핑물, 주요 상점들이 대거 문을 닫고 자본이 대거 유출되어 경제성장률 역시 마이너스 7-8%대(2002-2003년)를 찍는 등 경제상황은 막장에 이르게 되었으나 차베스는 이를 오히려 기회를 삼아 군대를 동원하면서까지 지지기반인 빈민층들에게 주요 생필품을 보급해주고 카라카스 한복판에 민중시장을 개설하며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결국 장기간 총파업은 기세가 시들해지며 실패로 끝나갔다. 이 석유파업은 "일반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그 동안 기득권을 노렸던 석유관련업 종사자, 간부들의 파업"이라고 평가절하되고는 하지만 만, 이 파업으로 인해 차베스에게 해고된 국영 석유기업 PDVSA 임직원의 수는 18,000명으로 회사 총직원수의 40%에 달했으며 특히 연구개발부서인 Intervep의 인력은 80%가 해고됐는데, 차베스는 이에 더해 이들을 베네수엘라의 석유 관련 업종에 다시는 취업하지 못하도록 보복했고 해고당한 석유산업 핵심 숙련 노동력 및 연구개발자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죄다 해외로 빠져나갔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2000년대의 석유 호황기에 증가는커녕 정체 내지 후퇴했다. 이웃 국가 콜롬비아가 석유생산량을 두 배 가까이 늘릴 때 핵심 중의 핵심 국가산업인 석유산업의 생산성에 대해 이런 자해행위를 거리낌 없이 행한 덕분에 베네수엘라는 유가가 폭락한 2010년대 경제파탄을 겪게 된다. 총파업이 실패로 끝나가기 직전에 야권은 소환투표안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총 유권자 가운데 20%의 서명(254만명)을 얻어 차베스 소환투표를 청구하였고 진통 끝에 1년 뒤인 2004년 8월에 소환투표가 실시되었으나 때마침 베네수엘라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결국 선거결과는 2000년 대선에서 나타난 6:4 구도 그대로 나타나면서 결국 야권은 차베스 정권을 뒤엎는데 실패했다. 이 선거에서 반 차베스 표는 2000년 대선 때에 비하면 훨씬 많았지만(252만표-> 357만표). 이게 투표율 상승효과(2000년 대선 56%-> 2004년 국민투표 70%)에 힘입은거라 친 차베스파도 투표율 상승의 효과를 누려서 (357만표->499만표) 2000년 대선 때에 비해 훨씬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지방선거에서도 여당 연정은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연이은 패배에 힘을 잃은 야권은 2005년 총선을 보이콧했고 결과적으로 의회를 여당이 독차지하게 되면서[* 야권이 보이콧하면서 보나마나한 선거가 되는 바람에 투표율은 25%대에 그쳤다. 참고로 2010년 총선 투표율은 66.4%.] 차베스가 독주하는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후 야권은 자신들의 실책을 인정하고 뼈저리게 반성하게 된다. 반면, 차베스는 덕분에 '민주적으로'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 정책의 대부분은 이 2005년 총선 다음부터 실행이 된다. [[2006년]]에 여당 연정을 [[통일사회당]]이라는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시키는데 성공한 뒤에 대선에서도 오일쇼크 시기 이후 최대의 경제호황에 힘입어 74.6%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고[* 1988년 대선 이후 최다 투표율.] 62.9%라는 득표율(1947년 첫 직선제 대선 이후 최다 득표율)로 3선(5공화국 헌법상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엔 야당이 2005년 총선을 일방적으로 보이콧해 여당이 의회를 거의 독차지하던 상황이었던 것도 있고, 압도적인 지지율에 자신감을 얻은 차베스는 헌법을 개정해서 연임 제한 규정을 철폐하려 했다. 차베스가 제시한 개헌안에는 선거참여가능 연령 18세에서 16세로 인하, 성차별 철폐와 인종차별 철폐 규정, 근로시간 단축(주당 44시간에서 36시간으로 단축), 여성선출직 확대, 사회보장제도 확충 등을 패키지로 담고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으나 행정부 권한 강화나 대통령 권한 강화 등의 법안이 들어가있어 부결되었다. 그 외에도 개헌안에 쓸데없이 너무 많은 조항을 담았고(그것도 A안과 B안으로 나누어서!) 개헌 국민투표 과정이 여당에 의해 속도전으로 진행되다보니 도저히 일반인들이 개헌안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한 몫했고, 낮은 투표율에 1%의 차이로 실패했기 때문에, 차베스 지지자 측에서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여 패배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2008년]] 지방선거 압승과 함께 자신감을 얻은 차베스는 다시 교묘하게 개헌안을 비틀었는데, 드디어 [[2009년]] 2월 모든 선출직 공무원의 연임제한 규정 폐지안이 상정되어 국민투표를 통해 연임제한이 철폐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유가하락의 여파로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2010년 총선에서 의회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고 통일사회당의 득표율은 야당연합보다 1%의 득표를 더 얻는데 그쳤으며 공동여당인 베네수엘라 공산당과 합쳐도 득표율 50% 초반 수준으로 부진을 거두었다. 그래도 차베스의 경쟁력은 대단하긴 해서 대선후보 선두주자이긴 했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